Geek Lover

30일, 집들이겸 귀국환영회겸 송년회가 있었습니다. 에지간한 친구 만날 때도 절대 입어본 적 없는 무릎 나온 츄리닝에 맨발, 게다가 정말 스킨도 안바른 쌩얼로 갔습니다. 멤버는 결성 십년쯤 ㅡ_ㅡ 되어가는 나우 노트북 동호회 멤버들 되겠습니다. 한 때 에지간한 노트북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비자의 힘을 자랑하던 인간들(다르게 말하면 진상 블랙리스트 멤버들??)이 죄다 늙어서는 마눌님 또는 주니어를 대동하고 나타납니다.

보통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는 느슨하고들 이야기합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되더라도 그 관계가 오래가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인간들을 생각할 때마다 “느슨은 개뿔"을 외치게 됩니다. 처음 모인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사람들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고 대화도 조낸 긱스럽습니다. 에지간한 가젯 종류는 모델명으로 말해도 모두가 무리 없이 알아듣고, 상태 심해지면 프로젝트명으로 말해도 문제 없습니다. 못쓰게 된 이런 저런 제품에서 부품들을 뗘다가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내는 짓도 잘하고(예를 들어 고장난 노트북 몇 개를 모아 네비게이션을 만들어 달아버린다던가), 서로 서로 지름신 강림을 부추기는 이상한 모임입니다. 요새 이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DSLR 카메라와 자전거, 자동차 되겠습니다. 몇 백만원짜리 새 장난감을 사고 싶어도 마눌님의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겠지만요.

저는 스무살 때 이 모임에 처음 나갔는데, 생각해보면 저런 대화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죄다 남자들 뿐인데도 참 오래 잘도 버텼다 싶습니다. 신촌에서 처음 만나 인사할 때는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상상은 못해봤는데 말이죠. 이젠 오라버니들 거의 다 유부에 편입되셨습니다. 이제 오래된 농담이 실현될 날이 머지 않았어요. 다들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살게되거들랑 45인승 버스 대절해서 “축 노트동 야유회"라고 수건에 인쇄해서 놀러가쟈고요. 🙂

내 이 날의 다구리를 잊지 않으리요. 늘 외계어들 사이에서 겉돌았던 막둥이(=멜)는 이직을 하는 바람에 구성원 대다수가 개발자 내지는 그 주변환경에서 근무중인 사람들로 구성된 이 모임에서 지대 다굴당했습니다. 패치가 어쩌고 비쥬얼 스튜도 2008이 어쩌고. 블랙잭을 들여다보며 윈도 모바일이 어쩌고 저쩌고. 문제의 마지막엔 MS가 있을 때가 많다며, 그러나 늘 대답은 담 버전에서 해결해줄게~ 라 한다고 이야기할 때 속상했습니다. 꼬미/쫑이 오라방. 당신들의 야근/주말근무에 울 회사가 일조한 적 있다면 내 미안타. 어쩌겠누 다 사람이 만드는 건데 완벽할 수 없자네……?

새삼스럽게 질문합니다. 나는 왜 하고 많은 모임중에, 이 노트북 동호회 사람들과 유독 오래 인연을 유지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데, 전 이 별스러운 남정네들이 사랑스럽습니다. 비록 가끔 비싼 어른용 장난감을 질러 주실지언정, 이런 타입의 사람들 중에 바람을 핀다거나,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거나 하는 나쁜 아저씨들 거의 못봤어요. 뭐랄까 사람들이 좀 순진하고 착하달까.

다굴 당하면서도 쫌 행복했습니다. 당신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대우받고 성공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매번 아놔 이 개발자님아,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일반 소비자를 이해 못한다고 구박하지만. 어찌 됬건 그대들이 더 성장하고 잘 나가서 배아팠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분들을 포함하여, 세상 긱스런 님들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상 레이디인 척 해왔던 너드의 일기였습니다. 🙂

한성은
한성은
데이터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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